성경

아합의 짧은 겸비, 므낫세의 늦은 회심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성경탐구, 구원의 역사, bible153 2026. 5. 11. 21:24

아합과 므낫세는 각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서 대표적인 악한 왕이다. 아합은 북이스라엘을 바알 숭배의 깊은 죄악으로 이끌었고,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남유다를 우상숭배와 피 흘림의 죄로 물들였다. 이들의 죄악은 두 왕국의 영적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성경에 기록돼 있다.

 

그런데 열왕기상과 역대하에는 뜻밖의 장면도 기록돼 있다. 열왕기상은 아합 왕의 짧은 겸비를, 역대하는 므낫세의 늦은 회심을 기록한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토록 악했던 왕들이 잠시나마 하나님 앞에서 낮아졌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

1. 아합 왕의 짧은 겸비의 순간

아합은 그의 아내 이세벨과 함께 바알 숭배를 북이스라엘에 확산시켰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후,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합 집안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아합은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금식하며 풀이 죽어 다녔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열왕기상 21:29)

 

이 장면은 매우 놀랍다. 아합의 겸비는 오래 지속된 온전한 회개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짧은 낮아짐에도 반응하셨고, 그 장면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

 

오늘날 신앙인의 시선에서 보면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다. 

 

“그동안 저지른 죄가 얼마인데, 잠깐 겸손한 척한다고 달라지는가.”

“저런 악한 왕에게 왜 아직도 기회를 주시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의 마음이 잠시라도 낮아진 것을 주목하셨다. 심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심판의 시기는 유예됐다. 하나님은 아합의 악을 모르신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악한 왕의 짧은 겸비조차 외면하지 않으셨다.

2. 므낫세의 늦은 회개와 개혁

므낫세는 남유다의 대표적인 악한 왕이다. 그는 성전에 우상을 세웠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겼으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고,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 열왕기하는 유다 멸망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므낫세의 죄를 지목한다.

 

그런데 역대하에는 의외의 장면이 기록돼 있다. 므낫세는 앗수르 군대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갔다. 그 환난의 자리에서 므낫세는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해졌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역대하 33:12–13)

 

므낫세의 회개는 아합보다 더 분명한 변화로 이어졌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 이방 신들과 우상을 제거하고, 여호와의 제단을 보수하며,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령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므낫세를 긍휼히 여기셨다. 므낫세가 저지른 악한 일들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공의인가.”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죄악으로 이끈 왕이 뒤늦게 회개했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가.”

 

악인의 짧은 회심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인색하다. 억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므낫세의 회개를 들으셨다. 물론 므낫세의 죄악이 남긴 결과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워버리지는 않으셨다. 므낫세 개인은 긍휼을 입었지만, 그의 죄가 유다 공동체에 남긴 상처와 그에 따른 심판은 역사 속에 남았다.

3.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

아합과 므낫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다시 묵상하게 한다.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아마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 왜 아합을 그냥 두십니까.”

“왜 므낫세가 주의 백성을 죄악으로 끌고 가도록 허용하십니까.”

“왜 즉시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악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받는 현실 앞에서 성도는 탄식할 수밖에 없다. 시편의 많은 기도도 바로 그런 탄식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아합과 므낫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시각을 열어준다.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침묵이 방치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때때로 악인에게도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악인의 아주 작은 겸비의 흔적, 늦게라도 돌아서려는 회개의 몸부림까지 놓치지 않으신다. 이것이 인간이 다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이다.

4. 솔로몬이 노년에 범한 죄악들

아합과 므낫세가 악한 왕의 자리에서 잠시나마 하나님 앞에 낮아진 사례라면, 솔로몬은 반대편에서 우리에게 경고를 준다.

솔로몬은 지혜로 시작한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고, 하나님께 위대한 기도를 드렸다. 그의 시작은 겸손했고, 그의 사명은 영광스러웠다.

 

그러나 노년에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신들을 따랐다. 결국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진노하셨고, 그의 왕국은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솔로몬의 이야기는 신앙의 출발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끝까지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은혜롭게 시작했다는 사실이 끝까지의 순종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5. 시련과 고통은 죄를 씻어내는 훈련의 과정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많은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왜 저 사람을 그냥 두십니까.”

“왜 악한 자가 형통합니까.”

“왜 불의한 사람이 더 오래 기회를 얻습니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도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공의를 빌려 우리가 심판자가 되려는 욕심이 숨어 있을 때도 있다.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누군가의 멸망을 바라는 마음,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면서 사실은 내 분노가 정당화되기를 원하는 마음, 악인을 판단하면서 내 안의 교만은 보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시련과 고통은 어떤 면에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악의 찌꺼기들을 걸러내는 용광로의 시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오래 참으시는 것을 보며 분노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 참아주셨다는 사실은 쉽게 잊는다.

 

시련은 그런 우리의 위선을 다듬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 안의 날카로운 정죄심을 꺾으시고, 더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

6.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이해보다 크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착한 사람을 품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회개의 시간을 주시는 사랑이다. 우리가 포기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돌아올 길을 열어두신다.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 안에서도 하나님은 아주 작은 겸비의 흔적을 보신다.

 

이 사랑은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우리도 오늘 살아 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속에 회개의 기회를 얻은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값싼 용서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아합의 집안은 결국 심판을 받았다. 므낫세의 죄도 유다 멸망의 역사적 원인으로 남았다. 하나님은 아합의 짧은 겸비를 보셨고, 므낫세의 늦은 회개를 들으셨지만,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까지 무효화하지는 않으셨다.

 

아합의 짧은 겸비도 보신 하나님, 므낫세의 늦은 회개도 들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작은 낮아짐도 보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과 고통의 과정에서 누군가를 향해 심판자의 자리에 서기보다, 그 시간을 우리 안의 죄악을 걸러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거룩과 정결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