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낙원, 심판에 대한 묵상
장례식장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천국 가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떠나보내며 유가족을 위로할 때, 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이 말을 꺼낸다. 죽음을 이긴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슬픔을 덜어주기 위한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그분은 지금, 천국에 가 계실까?”
성경을 꼼꼼히 읽다 보면, 죽자마자 바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죽은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른다고 말씀한다. 구원과 심판 사이, 그리고 낙원이라는 단어의 의미까지 살펴보면, ‘죽으면 바로 천국’이라는 믿음은 조정이 필요하다.
죽음 다음에 심판… 그 순서를 보자
히브리서 9장 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과 심판 사이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다. 심판은 죽은 자 모두가 서야 하는 하나님의 보좌 앞이다. 그런데 죽자마자 천국에 간다는 말은, 심판이 생략된 듯한 인상을 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어서 곧바로 천국에 간다면, 심판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분명히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 이후에도 하나님 앞에서 ‘공적’을 평가받는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믿는 자에게도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심판은 구원의 여부가 아닌, 그 이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다.
바울의 경고 – 상 잃지 말라
바울 사도는 구원의 확신을 전했을 뿐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한 경각심도 끊임없이 강조했다.
고린도전서 3장 13~15절: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어떤 사람의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의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구원은 받되 상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헛되었다면, 불 가운데 겨우 건짐을 받는 것과 같은 수치스러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은혜지만, 심판대에서 드러나는 공적은 각자의 삶에서 비롯된다.
천국과 낙원은 다른 곳이다
누가복음 23장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을 근거로, 죽자마자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 그런데 여기서 ‘낙원(παράδεισος, 파라데이소스)’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천국(heaven)과는 표현이 다르다. 히브리 전통에선 ‘쉐올(Sheol)’ 또는 ‘아브라함의 품’(누가복음 16:22)으로 불렸고, 헬라어 성경에서는 ‘하데스(Hades)’ 또는 ‘파라데이소스’로 나타난다. 이 단어들은 죽은 자들이 부활과 심판을 기다리는 중간 상태를 의미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 ‘낙원’을 “예수를 믿고 죽은 자들이 최종 심판 전까지 머무는 상태”로 본다. 즉 천국이 아니라, 심판을 앞두고 의인의 안식을 누리는 장소라는 것이다.
죽은 영혼들이 모인 별도 장소가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사흘 동안 어디 계셨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단지 육체적으로 쉬신 것이 아니라, 그 영으로 어떤 ‘영적 공간’에 가셔서 선포하셨다. 그 장소는 ‘옥’이라 했고,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기록돼 있다. 이 ‘옥’은 지옥이라기보다는, 아직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는 중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경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이 역시 단순한 천국/지옥 이분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천주교는 이 중간 상태를 ‘연옥(Purgatory)’이라고 부른다. 물론 천주교의 전체 교리를 따를 수는 없지만, 이 ‘중간 상태’에 대한 사유 자체는 성경의 맥락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만은 아니다. 천주교는 구원이 단지 믿음의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전의 삶에 대한 정결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점은 바울이 말한 ‘공적의 시험’이라는 개념과도 닿아 있다.
개신교는 종종 ‘죽으면 바로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단순한 틀에 익숙해져 있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그 사이에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이 낙원이자, 중간 상태에서의 대기일 수 있다.
위로와 진리 사이, 균형을 세우자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믿은 자가 죽은 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천국 가셨습니다.” 이 말은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다. 분명 진심이다. 하지만 진리의 기준으로 보면, 성경이 말하는 순서와 상태를 무시한 말일 수도 있다. 유가족을 위로하는 마음이 앞서 불신자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왜곡해 전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조심스럽고도 성경적인 언어로 위로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주 안에서 안식하셨습니다”처럼, 심판 이전의 안식을 표현하는 말은 진리와 위로를 함께 담을 수 있다.